불행 기원을 들킨 사람에게 두번째서랍






단연코 그는 나의 결정적인 불행을 바라고 있다. 적어도 작은 행운의 기회비용이 될 만한, 혹은 그 이상의 불운과 상처를. 그 가치 판단은 스스로의 경험이라는 협소한 데이터 내에서, " 나의 고생은 정말 끔찍하고 무서웠으며, 그것을 이겨낸 나는 신화적인 영웅 " 이라는 괴랄한 자기연민을 기둥으로 지은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라 자칭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보여주는 선택적 자의식에 찬사를 보내왔다. , 저것도 능력이다, 하는 식으로.

 





내 불행을 바라고 있(었)다는 말은 그 뜻을 함의한 말의 획들이 만든 가시 때문에라도 더더욱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바람직한 길이 있으며 그것은 내가 선지자로 먼저 경험한 것이고, 내가 개똥밭을 굴러서 그 바람직한 길을 겨우 얻었음을 너에게 알린다, 같은 오만의 말을 들었다. 맥을 끊어버렸다.어떤 사람이든 잃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므로.

 





그는 그때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는 그런 뜻으로 말하는 건 아니지만- 이라는 토를 달며 더 한 말을 붙였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 아예 바닥을 치면 돼요






여기에서 바닥을 더 치라고? 나는 잠시 멍한 얼굴로 보았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실언을 알아챈듯 부연설명을 붙였다. 그러니까, 본질에 닿을 수 밖에 없게 더 힘든 시련을 겪으면- 아니, 그러니까 오해할 수 있는 말이고 그렇게 들리지 않을 거란 것도 아는데-


"정말 나쁜 말이라는 걸 알지만"그는 내가 바닥을 더 굴러야 한다고 거듭해서 말했다말을 꺼내놓는 그의 두 눈은 반짝거렸다그러니까 나는 그가 생각하는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지금 하는 고생보다 더한 것을 하며 더 바닥을 쳐봐야 한단 말이다.





그는 실언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자신에게 어떤 악한 의중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그 전까지 이어졌던 화제에서부터 줄곧 자신의 지난 상처들을 열거하고 있었다. 자신은 착하고 순진무결하여 악한 자들에게 이용만 당했다는 최면이 그렇게나 달콤할까? 그에게서, 자신이 그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발언 따위 들어본 일이 없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겪는 고통은 자신이 겪은 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생을 매개로 한 마스터베이션이 가능한 것일 수도 있겠다. 마주 앉았던 나는 일종의 자위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시련을 견디며 자라난 가련한 자신을 어여삐 여기는 데에나 집중해 달라는 투정을 부린 것이라면, 나는 사람을 잘못 사귄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매도하는 방법을 택하는 순간에는 그가 자랑하는 '자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모양이지. 혹은 어떤 부문에서라도 나보다 자신이 좀 더 우등함을 뽐내고 싶은 이상한 경쟁심이라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타인의 가십이나 씹고 싶은 이기심의 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를 가정해도 그를 최악으로 떨어뜨리는 문장만 떠오를 뿐이다.

 





그의 지적 오만함은 당사자 빼고 주변인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성질이다. 하지만 고통을 소화시키는 멋진 나라는 최면, 남의 불행에 두 눈을 반짝이며 훈계나 충고를 전하는 자기과시까지 동시에 연결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지능이 지지받지 못했기에, 인생의 고통에 대한 충고만 가능하다며 '현자 코스프레' 를 하는 아둔한 자는 얼마나 가엾은가! 그의 입에서 지독한 구취를 맡은 것 같이 신물이 올라오고 머리가 아팠다.

 





무심코 건네는 말 한 마디에 심연이 담겨있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실수하고, 조심하기로 마음 먹고, 다시 고삐를 놓친다. 생각을 비워뱉은 단어를 허공으로 붕 띄워 올린다고 그 안에 담긴 악의를 감출 수 있을까. 단어가 부유하는 순간 말 바깥으로 넘칠 듯이 찰랑대는, 혓바닥 검은 짐승 같은 것들. 그것들을 고개 들어 올려다보게 되는 요즘, 별반 다르지 않은 그림자를 가진 내가 그것들을 기꺼워해도 될까 싶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내가 자신들의 불행 기원을 보지 못 하리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나 역시 저런 것들을 칠칠 맞게 밖으로 흘리는 순간이 있겠지? 하긴 이런 상황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가며 앞뒤 안맞는 글로 남겨두고 있는 걸 보면, 나 역시 찌질함을 흘리며 주위 사람들을 오만으로 휘둘러 팼던 경험이 있다는 반증일 수 있겠다. 방어 기제가 작동한 것이다. 흑역사가 따로 없다.

 




지금 그 말씀 실수하시는 거예요. 말씀 잘못하신 것 같아요.

 

내가 그와 똑같은 이로 평가절하 당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앞뒤 수식어를 다 잘라낸 실수라는 말 뿐이었다. 먼저 그의 잘못을 포장해주며 오늘의 화를 다음 날로 미루는 일. 그가 가진 추악한 면을 일일이 까뒤집어 드러내 봤자 득이 될 일이 없다는 것을 다행히 알고 있으니까. 내 앞자리를 채우고자 만들었던 시간들이 그에게 너무 많은 희망을 만들어 주었나, 하고 스스로에게 책임을 잠시 돌렸다. 하려던 말의 대부분을 침묵으로 바꾸어 그나마 면은 차렸음에도 불구하고, 올해의 내 자살시도 이력을 떠든 것이 못내 후회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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